맨위로가기

1933년 3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33년 3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된 후 치러진 선거로, 나치당의 권력 장악과 독재 체제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국회 해산과 선거를 요구하며,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탄압하고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선거 결과 나치당은 43.9%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연립 여당과 공산당 의석 소멸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치당은 이 선거를 통해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키면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33년 선거 -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재선 도전, 아돌프 히틀러와 에른스트 텔만 등 주요 지도자들의 출마로 혼전 끝에 힌덴부르크가 재선에 성공했으나, 히틀러의 높은 득표율은 나치당의 부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 1933년 선거 - 1933년 11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1933년 11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나치당이 압승을 거두며 히틀러의 권력 강화와 독일의 전체주의 체제 강화에 영향을 미친 선거이다.
  • 1933년 3월 - 전권 위임법
    전권 위임법은 1933년 독일 국회에서 나치 정부가 의회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통과시킨 법률로, 나치 독재 체제 확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바이마르 헌법 체제하에서 제정되었으나 헌법의 근본 원리를 훼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33년 3월 - 열하사변
    열하사변은 1933년 일본군이 만주국 확장을 위해 러허 성을 침공하여 츠펑 시, 청더 시 등을 점령하고 러허 성을 만주국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 1933년 독일 - 전권 위임법
    전권 위임법은 1933년 독일 국회에서 나치 정부가 의회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통과시킨 법률로, 나치 독재 체제 확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바이마르 헌법 체제하에서 제정되었으나 헌법의 근본 원리를 훼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33년 독일 -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은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발생한 화재로,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자 소행으로 몰아 권력을 강화하고 독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이용했다.
1933년 3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선거 개요
국가독일
선거 종류의회 선거
선거 날짜1933년 3월 5일
이전 선거1932년 11월 독일 총선거
차기 선거1933년 11월 독일 총선거
선출 의석수647석
과반 의석수324석
투표율71.6%
내각히틀러 내각
해산일1933년 2월 1일
선거 제도비례대표제
유권자20세 이상의 독일 국민
유권자 수44,685,764명
선거 결과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
에른스트 텔만
에른스트 텔만
루트비히 카스
루트비히 카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하인리히 헬트
하인리히 헬트
정당나치당
지도자아돌프 히틀러
이전 선거 결과196석 (33.09%)
최종 의석288석
의석 증감증가 92석
득표수17,277,180표
득표율43.91%
득표율 증감증가 10.82%
정부 구성
이전 수상아돌프 히틀러
이전 정당나치당
이후 수상아돌프 히틀러
이후 정당나치당
지도
선거구별 결과
선거구별 결과
군 및 독립시별 결과
군 및 독립시별 결과

2. 배경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된 후, 나치당은 재선거를 실시했다. 나치당이 장악한 정부는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을 탄압했다. 돌격대친위대가 사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여 테러를 자행해도 나치당 정부는 이를 방관했다. 중앙당 계열 신문이 이를 비판하자 중앙당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1]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나치당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선동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 명을 체포했다.[1]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하여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비상 포고령인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켰다. 이 비상법은 많은 시민의 자유를 없앴고, 공산주의 표를 억압하고 나치의 입지를 강화했다.

히틀러는 KPD를 완전히 금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금지령이 내려질 경우 폭력적인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고, KPD가 투표에 참여하면 사회민주당의 표를 잠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 간부들을 수천 명씩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했다.[1]

대기업과 국가의 자원은 독일 전역에 완전한 보도를 달성하기 위한 나치의 캠페인에 투입되었다. 갈색 셔츠단과 친위대는 도시와 마을의 거리를 위협적으로 순찰하고 행진했다. "공포, 억압 및 선전의 조합이 전국의 모든... 크고 작은 지역 사회에서 동원되었다".[1] 프로이센 자유주에서 SS, SA 및 ''데어 슈탈헬름'' 소속 5만 명은 헤르만 괴링 내무장관 대행의 또 다른 포고령에 따라 부보안관 또는 보조 경찰(''힐프스폴리차이'')로 투표를 감시하도록 명령받았다.[4]

2. 1. 히틀러 내각 성립과 국회 해산

1933년 1월 30일, 국민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히틀러 내각 초기, 나치당 각료는 히틀러 외에 괴링(무임소상), 프리크(내무상) 3명뿐이었다. 다른 각료들은 힌덴부르크의 측근이자 부수상인 파펜이 인선하여 독일 국가인민당이나 철모단 등 보수파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는 다수의 보수파 각료를 통해 히틀러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파펜의 의도였다.[2]

당시 나치당은 국회의 제1당이었지만, 연립 여당인 국가인민당과 합쳐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히틀러 내각은 국회로부터 내각 불신임안에 직면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전처럼 국회를 무시하고 대통령 긴급령으로 정치할 것인지, 총선거에서 여당 과반수를 확보할 것인지, 중앙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일 것인지, 독일 공산당 의원의 자격을 정지할 것인지(공산당 의석 정지로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이 과반수를 확보 가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1]

힌덴부르크는 중앙당 포섭을 원했기에 내각은 우선 중앙당과 연립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보수파 각료에 의한 포위 상태를 돌파하고자 총선거를 원했고, 국가인민당 당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도 가톨릭 혐오와 농업 및 사회 정책 이해관계로 인해 중앙당의 정권 참여를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각과 중앙당의 연립 협상은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2월 1일 힌덴부르크에게 협상 실패가 보고되었다. 같은 날 각의에서 히틀러는 총선거를 요구했지만, 후겐베르크는 나치당 압승으로 인한 국가인민당의 영향력 저하를 우려하여 총선거를 반대하며 공산당 금지로 의석을 박탈하여 과반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히틀러의 주장대로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2월 1일, 히틀러의 요청으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했다. 수상에 임명된 히틀러는 즉시 재선거를 실시했다. 나치당이 장악한 정부는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을 탄압했다. 돌격대친위대가 사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여 테러를 자행해도 나치당 정부는 이를 방관했다. 중앙당 계열 신문이 이를 비판하자 중앙당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나치당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선동했다. 그리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 명을 체포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하여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비상 포고령인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켰다. 이 비상법은 많은 시민 자유를 없앴고, 공산주의 표를 억압하고 나치의 입지를 강화했다. 히틀러는 KPD를 완전히 금지하는 대신, 공산주의 간부들을 수천 명씩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2. 2. 나치당의 선거 운동과 탄압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된 후, 나치당은 재선거를 실시했다. 나치당이 장악한 정부는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1] 돌격대친위대는 사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여 테러를 자행했지만, 나치당 정부는 이를 방관했다. 중앙당 계열 신문이 이를 비판하자 중앙당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1]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나치당 정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선동했다.[1]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 명을 체포했다.[1]

히틀러는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로부터 국가를 구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라고 비난하며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2] 2월 초, 나치는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폭력과 공포 캠페인을 시작했다".[3] 2월 후반에는 폭력이 사회민주당으로 확대되어, 갈색 셔츠단이 사회민주당 집회를 방해하고 연설자와 청중을 폭행했다. 사회민주당 신문 발행이 금지되었다.[1]

히틀러는 공산당을 완전히 금지할 수도 있었지만, 폭력적인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공산당 간부들을 수천 명씩 감옥에 가두었다.[1]

요제프 괴벨스가 지휘한 나치당의 선거전은 국가 조직과 국고를 사용하여 진행되었다. 라디오는 나치당의 중요한 선전 기관이 되었고, 히틀러의 연설은 다양한 방법으로 편집되어 방송되었다. 또한, 전국적인 유세, 특별 선거 집회, 포스터, 돌격대의 퍼레이드, 기관지 호외, 당기와 현수막, 비행기를 이용한 전단 살포, 스피커가 달린 선전 차량 등 다양한 선전 수법이 동원되었다. 나치당의 선거 슬로건은 "볼셰비키와 싸워라"와 "국민에게 과 직업을"이었다.

1933년 2월 20일, 헤르만 괴링은 경제계 요인들을 소집하여 정치 자금 파티를 개최하고 헌금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는 히야르마르 샤흐트,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보렌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5] 이들은 총 30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헌금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사실상의 계엄령인 "독일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이 발령되어 공산당과 사민당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공산당은 제대로 된 선거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으며, 2월 28일에는 4000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되고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3. 선거 과정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된 후, 국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나치당은 국회 과반수 확보를 목표로, 독일 공산당 등 반대파를 탄압하며 선거 운동을 진행했다.

선거를 6일 앞둔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나치당의 자작극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2] 히틀러는 이 사건을 빌미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비상 포고령인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키도록 설득했다. 이 법령으로 시민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독일 공산당 당원 4,000명이 체포되었다.[1] 사실상 공산당은 국회의사당 방화령이 발효된 날 불법화되었고, 선거 당일 완전히 금지되었다.[1] 사회민주당은 공산주의자만큼 심하게 탄압받지는 않았지만, 당 지도부가 이미 프라하로 도망가고 많은 당원들이 지하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활동도 제한되었다.

보안경찰(좌측)의 경찰관과 SS 대원, 그리고 그의 독일 셰퍼드 (우측). 이들은 "Hilfspolizei"("보조 경찰") 장교로 당에서 임명된 프로이센의 5만 명의 나치 중 한 명이었다.


1933년 3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결과 요약
정당득표수득표율(%)의석수증감
나치당17,277,18043.91288+92
사회민주당7,181,62918.25120-1
독일 공산당4,848,05812.3281-19
중앙당4,424,90511.2573+3
흑백적 투쟁 전선3,136,7607.9752+1
바이에른 인민당1,073,5522.7319-1
독일 인민당432,3121.12-9
기독교 사회 인민 봉사383,9990.984-1
독일 국가당334,2420.855+3
독일 농민당114,0480.292-1
농업연맹83,8390.211-1
독일-하노버당47,7430.120-1
기타 정당4,9640.010-
무효표311,698---
합계39,655,029100647+63
유효표44,685,76488.74--



3. 1. 각 정당의 선거 운동

1933년 1월 30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초기 내각에서 나치당 각료는 히틀러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고, 나머지 각료는 프란츠 폰 파펜 부수상이 독일 국가인민당이나 철모단 등 보수파 인사들로 채웠다. 이는 파펜이 히틀러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의도였다.[1]

당시 나치당은 국회 제1당이었지만, 연립 여당인 국가인민당과 합쳐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회 해산 후 총선거를 통해 여당 과반수를 확보하거나, 독일 공산당(KPD) 의원 자격을 정지시키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1] 히틀러는 총선거를 원했고, 결국 2월 1일 국회가 해산되었다.[1]

나치당의 선거 운동은 요제프 괴벨스가 지휘했다. 정권을 잡은 나치당은 국가 조직과 국고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다. 라디오, 신문, 포스터, 돌격대의 퍼레이드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했으며, "볼셰비키와 싸워라", "국민에게 과 직업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1]

2월 4일, 히틀러는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에서 준비했던 "독일 민족 보호를 위한 대통령령"을 발령하여 야당의 활동을 제한했다.[1] 2월 20일에는 히야르마르 샤흐트의 중개로 경제계 요인들을 소집하여 정치 자금 파티를 개최, 의 선거 자금을 모금했다.[5]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에는 "독일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을 발령하여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1]

사회민주당은 "투표 용지로 파시즘과 싸운다"는 구호를 내걸고 국가당과 공동 후보 명부를 작성하여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나치당의 조직적인 방해와 경찰의 간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에는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었고, 당 기관지는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1]

공산당은 나치당의 가장 큰 탄압 대상이었다. 2월 24일, 공산당 본부가 수색당하고, 2월 28일에는 "국민 및 국가 보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령"에 의해 4000명의 당원이 체포되어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1] 공산당은 사민당에 공동 투쟁을 제안했지만, 여전히 사민당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는 모순된 태도를 보여 거절당했다.[1]

중앙당독일 인민당에 도전했지만, 나치당과는 연대했다.[1]

히틀러는 연립 여당인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정부 구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보수 세력의 통일 명부 요청은 거부했다. 이에 파펜은 2월 11일에 국가인민당과 철모단을 결집시켜 보수 공동 전선 "흑백적"을 결성했다.[1] "흑백적"은 반사회주의 입장에서 나치당의 사회주의적 실험에 대한 경고를 하고, 권위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했지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1]

3. 2.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나치는 공산당사회민주당 등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1] 선거일 6일 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의 소행으로 알려졌다.[2]

히틀러는 이 사건을 빌미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비상 포고령인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키도록 설득했다. 이 법령으로 시민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공산당 당원 4,000명이 체포되었다.[1] 사실상 KPD는 국회의사당 방화령이 발효된 날 불법화되었고, 선거 당일 완전히 금지되었다.[1] 사회민주당(SPD)은 공산주의자만큼 심하게 탄압받지는 않았지만, 당 지도부가 이미 프라하로 도망가고 많은 당원들이 지하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활동도 제한되었다.

4. 선거 결과

1933년 3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의 득표율로 288석을 획득했다. 이는 단독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지만, 연립 여당인 국가인민당의 의석을 합하면 과반수를 넘었다. 이전까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권자들도 나치당에 투표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았으며, 투표율은 88.8%로 매우 높았다. 나치당이 획득한 1720만 표 중 300만 표는 이전까지 기권했던 유권자들의 표로 추정된다[1]. 이는 히틀러를 "국민 재상"으로 묘사한 나치당의 선전이 효과를 거둔 결과로, 이 선거에서 나치당을 지지한 새로운 유권자들은 나치당 자체보다는 히틀러 개인의 인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3월 9일, 독일 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그들의 의석(81석)이 소멸되었고, 총 의석수는 566석으로 감소했다. 이로 인해 나치당은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게 되었다[3].

국회의사당 전소로 인해, 3월 21일 국회 개회식은 포츠담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가 있는 가르니손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요제프 괴벨스의 연출로 성대한 개회식이 거행되었다. 이날은 포츠담의 날로 불렸다[4].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몇 주 안에 다른 국민적 단체와 협력하여 1918년 이래 독일을 지배해 온 세력을 제거하고,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을 국민적 지도부에게 되돌려 놓았다. 3월 5일은 독일 민족이 이 사건에 동의를 표한 날이다."라고 주장했다. 나치당은 이 선거 결과를 통해 "라이히 지도", 즉 "나치당과 그 지도자인 히틀러가 민족과 라이히를 이끈다"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독일 민족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선전했다[5].

국회 개회 이후, 의회는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되었으며, 3월 24일에는 전권 위임법이 가결되어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3월 31일, 란트와 라이히의 균제화에 관한 잠정 법률이 발효되어, 국회 선거와 같은 날인 1933년 3월 5일에 선거를 실시했던 Preußischer Landtag|프로이센 주 의회de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는 1933년 3월 5일 국회 선거에서 각 주마다 각 정당이 획득한 득표수에 따라 의석을 재분배했다(단, 독일 공산당에 대한 투표는 제외).

7월까지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7월 14일에는 정당 신설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11월의 선거는 나치당만이 참여하는 선거가 되었다.


  • 선거 제도: 비례대표제
  • 선거권: 20세 이상의 남녀
  • 투표율: 88.74% (이전 선거 대비 8.2% 증가)


정당명득표수득표율 (전회 대비)의석 (전회 대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17,277,18043.91% (+10.82%)288석 (+92)
독일 사회민주당(SPD)7,181,62918.25% (-2.18%)120석 (-1)
독일 공산당(KPD)4,848,05812.32% (-4.54%)81석 (-19)
중앙당(Zentrum)4,424,90511.25% (-0.68%)73석 (+3)
흑백적 전선
(철모단/국가인민당/Reichslandbund|전국농촌동맹de)
3,136,7607.97% (-0.37%)52석 (+1)
바이에른 인민당(BVP)1,073,5522.73% (-0.36%)19석 (-1)
독일 인민당(DVP)432,3121.10% (-0.76%)2석 (-9)
기독교사회국민봉사(CSVD)383,9990.98% (-0.16%)4석 (-1)
독일 국가당(DStP)334,2420.85% (-0.10%)5석 (+3)
Deutsche Bauernpartei|독일 농민당de (DBP)114,0480.29% (-0.13%)2석 (-1)
Reichslandbund|전국농촌동맹de (RLB)83,8390.21% (-0.09%)1석 (-2)
독일-하노버당(DHP)47,7430.12% (-0.06%)0석 (-1)
사회주의자 투쟁 협회3,9540.01% (신당)0석 (신당)
노농 투쟁 공동체1,1100.00% (변동 없음)0석 (변동 없음)
유효 투표 총수39,343,331100%647석 (+63)
무효표311,698--
투표 유권자/전체 유권자 수 (투표율)39,655,029명/44,685,764명 (88.74%)--



5. 선거 이후

1933년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의 득표율로 288석을 얻었다. 이는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지만, 연립 여당인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의석을 합하면 과반수를 넘었다. 이 선거에는 이전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권자층이 대거 참여하여 88.8%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나치당의 선전이 효과를 거두어, 히틀러에게 "국민 재상"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고, 새로운 나치당 지지자들은 나치당 자체보다는 히틀러 개인의 인기에 힘입어 투표한 것으로 분석된다.[1]

선거 후, 나치당은 독일 공산당을 비합법화하여 그들의 의석 81석을 소멸시켰다. 이로써 총 의석수는 566석으로 감소했고, 나치당은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게 되었다.[5]

국회의사당이 전소되면서, 3월 21일 국회 개회식은 포츠담프리드리히 대왕 묘소가 있는 가르니손 교회에서 열렸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요제프 괴벨스의 연출로 웅장한 개회식이 거행되었고, 이날은 포츠담의 날로 불렸다.[5]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이제, 이 몇 주 안에 다른 국민적 단체와 맺고 1918년 이래 독일을 지배해 온 세력을 배제하고, 혁명으로 국가 권력을 국민적 지도부에 되찾았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나치당과 히틀러가 독일 민족에게 새로운 정치 형태를 '신임'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국회 개회 후, 의사 진행은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이루어졌으며,[5] 3월 24일에는 전권 위임법이 가결되어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5]

3월 31일에는 란트와 라이히의 균제화에 관한 잠정 법률이 발효되어, 프로이센 주 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 의회의 의석이 1933년 3월 5일 국회 선거 결과에 따라 재분배되었다 (단, 공산당에 대한 투표는 제외).[5]

국회 개최일,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악수하는 히틀러 수상

5. 1. 나치당의 권력 장악과 독재 체제 구축

나치당은 1932년 11월 독일 연방 선거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히틀러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유권자 협박[1][4]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은 43.9%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

이에 히틀러는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의 연정을 유지해야 했다. 한편, 독일 공산당(KPD)은 득표수의 약 1/4을 잃었고, 독일 사회민주당(SPD)도 완만한 손실을 입었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곧 모든 공산당 의원들은 체포되거나 은신하게 되었다.

나치-DNVP 연합은 정부 운영에 필요한 의석은 확보했지만, 히틀러는 수권법 통과를 위해 2/3 이상의 다수결이 필요했다. 수권법은 내각, 즉 총리가 4년 동안 국회의 승인 없이 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었다. 나치당은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이용하여 공산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회의실 밖으로 내쫓는 등 의회 내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히틀러는 중앙당을 설득하여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지게 함으로써 필요한 슈퍼 다수를 얻었다. 1933년 3월 23일, 수권법은 찬성 444표, 반대 94표로 통과되었다. 오토 벨스가 이끄는 사회민주당만이 이 법안에 반대했으며, 3월 27일에 법안이 발효되면서 독일 정부는 ''사실상'' 합법적인 독재 체제가 되었다.

이후 4개월 이내에 다른 정당들은 강제 해산되거나 나치당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고, 독일은 공식적으로 일당 국가가 되었다. 1933년 11월, 힌덴부르크는 조기 선거를 실시했지만, 유권자들에게는 나치당과 객원 후보의 단일 목록만이 제시되었고 비밀 투표도 보장되지 않았다. 이로써 새로운 국회는 나치당과 그 지지자들로만 구성되었고,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잔재는 사실상 사라졌다.

1933년 3월 9일에는 공산당이 비합법화되어 81석이 소멸되었고, 총 의석수는 566석으로 감소하여 나치당이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게 되었다.[5]

국회의사당이 전소됨에 따라, 1933년 3월 21일 국회 개회식은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가 있는 가르니손 교회에서 열렸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요제프 괴벨스의 연출로 웅장한 개회식이 열렸으며, 이날은 포츠담의 날이라고 불렸다.[5]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이제, 이 몇 주 안에 다른 국민적 단체와 맺고 1918년 이래 독일을 지배해 온 세력을 배제하고, 혁명으로 국가 권력을 국민적 지도부에 되찾았다."라고 연설 하였다.

국회 개회 후, 의사는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되었으며, 1933년 3월 24일에는 전권 위임법이 가결되어,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5]

1933년 3월 31일에는 란트와 라이히의 균제화에 관한 잠정 법률이 발령되어, 모든 주 의회는 1933년 3월 5일 국회 선거에서 각 주마다 각 당이 획득한 득표수에 따라 의석수를 재분배했다(공산당에 대한 투표는 제외).[5]

1933년 7월까지 나치당 외의 전 정당이 해산되었고, 7월 14일에는 정당 신설 금지령이 제정되었다.[5] 그 때문에 다음 같은 해 11월의 선거는 나치당만의 선거가 되었다.

5. 2. 타 정당 해산 및 일당 독재

1932년 11월 선거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나치당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엄청난 폭력과 유권자 협박[1][4]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은 과반수가 아닌 43.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히틀러는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 연정을 유지해야 했다. 독일 공산당(KPD)은 득표수의 약 1/4을 잃었고,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완만한 손실을 입었다. KPD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KPD 대의원들이 의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며칠 안에 모든 KPD 대표들은 체포되거나 잠적했다.

나치-DNVP 연합은 정부의 기본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의석을 확보했지만, 히틀러는 수권법 통과를 위해 2/3의 다수결이 필요했다. 이 법은 내각(사실상 총리)이 4년 동안 국회 승인 없이 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이 법률은 바이마르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치당은 국회의사당 방화령 조항을 이용하여 모든 81명의 공산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여러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회의실 밖으로 내쫓았다.

히틀러는 중앙당을 설득하여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지게 함으로써 필요한 슈퍼 다수를 얻었다. 법안은 3월 23일 찬성 444표, 반대 94표로 통과되었다. 오토 벨스가 이끄는 사회민주당만이 3월 27일에 발효된 이 법안에 반대했다. 이 법안의 조항은 정부를 사실상 합법적인 독재 체제로 만들었다.

4개월 이내에 다른 정당들은 완전 금지 또는 나치 테러로 문을 닫았고, 독일은 공식적으로 일당 국가가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11월에 조기 선거를 실시했고, 유권자들에게 나치당과 객원 후보의 단일 목록이 제시되었으며 투표는 비밀리에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국회는 NSDAP와 지지자들로만 구성되었으며,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잔재를 사실상 청산했다.

3월 9일, 공산당이 비합법화되어 그 의석(81석)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총 의석수는 566석으로 감소하여 나치당이 단독 과반수를 획득했다.

7월까지 나치당 외의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7월 14일에는 정당 신설 금지령이 제정되었다. 그 때문에 같은 해 11월 선거는 나치당만의 선거가 되었다.

6. 관련 인물


  • 아돌프 히틀러(나치당 소속, 나치당 총통, 수상): 1933년 1월 30일 총리로 임명된 후,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다.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라고 비난하며 이들로부터 국가를 구하겠다고 약속했다.[2]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를 체포하고,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켜 많은 시민 자유를 없앴다.[1]
  • 파울 폰 힌덴부르크: 당시 독일 대통령으로,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의 설득으로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통과시켰다.[1]
  •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1]
  • 에른스트 텔만: 독일 공산당(KPD) 지도자로, 국회의사당 방화령 이후 다른 KPD 지도자 및 당원 4,00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1]
  • 헤르만 괴링: 프로이센 자유주 내무장관 대행으로, SS, SA 및 ''데어 슈탈헬름'' 소속 5만 명을 보조 경찰(''힐프스폴리차이'')로 임명하여 투표를 감시하게 했다.[4] 또한, 1933년 2월 17일 발령된 포고령에서 프로이센 경찰에게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작전에서 무제한적으로 총기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다.[4]
  • 막스 아만: 나치당 소속으로, 나치당 출판 전국 지도자였다.
  • 헤르만 에서: 나치당 소속으로, 초기의 나치당 선전 담당자였다.
  • 프란츠 젤테: 「흑·백·적」전선 소속으로, 노동상이었다.
  • 프란츠 폰 파펜: 「흑·백·적」전선 소속으로, 부수상 겸 전 총리였다.
  •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 나치당 소속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넷째 황자였다.
  • 루돌프 헤스: 나치당 소속으로, 나치당 부총통이었다.

참조

[1]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https://archive.org/[...] Penguin Press
[2] 간행물 Hitler and the Functioning of the Third Reich https://www.taylorfr[...] Routledge 2007-09-01
[3]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https://books.google[...] Penguin 2005
[4] 웹사이트 Violence Unleashed http://www.berlin.de[...] 2016-01-15
[5] 문서 "#フ下|フェスト 1975 下巻"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